올해 주주총회 시즌이 끝났다. 변화는 분명 있었다. 상당수 기업이 정관을 개정했고, 전자투표 도입 기업도 꾸준히 늘었다. 상법 개정 이후 첫 주총이었으니 분명 이전과 달라진 풍경이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주주 제안을 들고 싸운 주주들의 말은 달랐다.
김민국 VIP자산운용 대표는 최근 인터뷰에서 “현행 구조로는 기업 변화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했다. 제도는 바뀌었는데 운동장은 여전히 기울어져 있다는 것. 그가 꺼낸 해법은 거버넌스 코드(governance code) 도입이다.
현재 한국 자본시장의 거버넌스 구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투자자에게는 의무가 있고, 기업에게는 없다.
2016년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는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에게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이다. 주주총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경영진과 대화하고 배당 확대를 요구하는 것은 기관투자자의 ‘의무’가 됐다.
그런데 기업은? 아무런 답변 의무가 없다.
투자자가 합리적인 요구를 해도 기업이 이를 검토했는지 밝힐 의무도 이유도 없다. 최대주주가 과반 지분을 쥐고 있다면 주총 표결은 시작 전 이미 끝난 게임이다. 김민국 대표가 “투자자가 아무리 합리적인 요구를 해도 회사는 이를 받아들일 의무가 없다”고 지적한 것이 바로 이 구조다.
일본 금융청은 스튜어드십 코드(2014년)와 거버넌스 코드(2016년)를 함께 도입하면서 이 둘을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했다. 투자자가 밀고, 기업이 응답해야 시장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한국은 9년 째 한쪽 바퀴 만으로 수레를 끌고 있다.
거버넌스 코드란 무엇인가
거버넌스 코드(Corporate Governance Code)는 기업이 주주와 이해 관계자에게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규범 체계다. OECD 기준으로 전 세계 80% 이상의 국가가 채택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comply or explain'(준수 또는 설명) 원칙으로 작동한다. 이 기준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 공개적으로 설명하라는 것이다.
핵심은 기업의 침묵할 자유를 없애는 것이다. 즉 거버넌스 코드는 기업이 주주와 이해 관계자들에게 설명할 책임을 지게 한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 이사회에 독립 사외이사를 일정 비율 이상 두고 주주와 대화 정책을 공시하며, 자본효율성 목표(ROE 등)를 설정하고 달성하지 못하면 이유를 해명해야 한다. 계열사 간 정책적 주식 보유(정책보유주식)를 줄이는 방향으로 검토해야 하고, 주주 제안이 들어오면 이사회 차원에서 검토한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시장에서 사실상 따를 수밖에 없는 규범(soft law, 연성 규정)이다. 거버넌스 코드 자체는 법률이 아닌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이 코드를 도쿄 증권거래소(TSE)의 상장규정 안에 편입시켰다. 코드를 준수하지 않으면 그 이유를 기업지배구조 보고서에 공시해야 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상장 지위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법적 강제는 아니지만 사실상 의무화한 셈이다. ‘법률과 비슷한 구속력’이 발생한다.
기업이 무시해도 되는 단순한 자율 규범은 아닌 것이다. 주주에게 설명하지 않으면 상장 시장에서 패널티를 받는 것, 거버넌스 코드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미국은 왜 거버넌스 코드가 없나
미국은 전국 단위의 거버넌스 코드를 채택하지 않았다. 대신 주(州) 회사법, 연방 증권법, SEC 규칙, NYSE·나스닥 상장 규정이 거버넌스를 규율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의 ‘comply or explain'(준수 또는 설명) 방식과 달리, 미국의 거버넌스 규칙은 강제적이다. 공시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이다. 거버넌스 코드는 없지만 법률로 강제되는 부분이 크고, 특히 ISS·Glass Lewis 같은 의결권 자문사가 사실상 기업 측에 압력을 가한다.
즉 미국은 거버넌스 코드 없이도 기관 투자자와 의결권 자문사의 시장 압력이 거버넌스[기업이 주주에게 책임있게 행동하는 방식]를 유도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2025년 미국에서도 거버넌스 코드 도입 논의가 시작됐다. 미국에서도 법률 만으로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일본, 미국의 케이스에 비춰보면 한국은 상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법률은 여전히 약한데, 거버넌스 코드도 없고, 의결권 자문사도 약한 세 겹의 공백이 존재하는 상태다.
“무시하면 된다” 대원산업 주총 사례
올해 주총에서 이 구조의 한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케이스가 있다. 바로 자동차 부품업체 대원산업이다.
VIP자산운용은 지난 3월 대원산업 주총에서 집중투표제 배제 반대와 배당 확대를 요구했다. 이 회사는 순현금만 4100억원을 쌓아둔 채 배당을 거의 하지 않는 기업이다. 시가총액은 보유현금보다도 작다. VIP자산운용의 요구사항은 주주 입장에서 충분히 합리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최대주주 측 지분율이 63%에 달했기 때문에 주총 결과는 뻔했다. 회사 측은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 VIP의 반대는 기록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이런 종목들은 한국 증시에 상당히 많은데 출구가 막혀있는 상태다. 교과서적인 밸류 트랩(Value trap)이다. 가격이 싼 데, 저평가 상태가 해소될 이유가 없는 종목이다. 현금이 아무리 많아도 주주에게 올 경로가 막혀있는 기업이다. 현금은 회사 안에 영원히 갇혀 있고 계속 디스카운트 상태로 머문다.
한국에서 이런 기업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0원이다. 주주의 요구를 무시하고, 기관 투자자의 미팅을 거절하고, 주주제안을 검토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만약 한국에 거버넌스 코드가 있었다면? 표결 결과는 동일했어도 대원산업은 최소한 질문에 공개 답변해야 한다.
“4100억 원의 현금을 왜 주주에게 환원하지 않는가?”, “집중투표제를 배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사회는 주주의 요구를 검토했는가?”
최소한 거버넌스 코드가 있다면 VIP자산운용 같은 행동주의 투자자에게는 무기가 생긴다. 주총에서 반대표를 던지는 걸 넘어, “회사 측은 코드를 위반했으니 해명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공식 근거가 생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10년 걸린 일본의 거버넌스 변화
일본은 2014년 스튜어드십 코드, 2015년 거버넌스 코드를 연달아 도입했다. 처음에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강제성도 없고 ‘일본식 기업 문화에 주주 친화적 경영이 뿌리내릴 수 있겠느냐’ 의혹이 가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변화는 느리지만 시작됐다. 기업들이 사외이사를 실질적으로 선임하기 시작했고, 계열사 간 복잡하게 얽혀 있던 정책보유주식을 줄여나갔다. IR 전담 임원직이 생겨났고 경영진 보수를 주가와 연동하는 구조도 도입됐다.
*정책보유주식이란, 일본 기업들이 거래처, 협력사, 금융기관 등과의 관계 유지 목적으로 서로의 주식을 보유하던 관행을 말한다. 도요타가 부품사, 협력사 주식을 보유하거나 거래 은행이 고객사 주식을 보유하는 식이다. 일본에서 정책보유주식은 주주환원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혔다.
일본에서 거버넌스 코드 도입 이후 기업 수익성, 자산 생산성, 배당, 인수합병 가치, 밸류에이션 배수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특히 사외이사가 이사회 과반을 차지한 기업에서 변화가 가장 두드러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거버넌스 코드의 경험이 쌓이고 쌓여, 2023년에는 도쿄증권거래소가 한 발 더 나아갔다. PBR 1배 이하 기업에 주가 부양 계획을 제출하라는 요구를 TSE 상장 규정에 추가한 것이다. 이에 2024년 일본 기업 1000곳 이상이 총 16조8100억 엔 규모 자사주 매입을 약속했고 배당금은 전년 대비 16% 증가한 23조엔을 기록했다.
코드 도입부터 시장의 가시적 변화까지 약 10년이 걸렸다. 2014년 1만6000이던 니케이 225 지수는 2024년 3월 4만 포인트를 돌파했다.
상법 개정과 거버넌스 코드, 두 축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거버넌스 개선 논의는 주로 상법 개정에 집중됐다. 그리고 지난해(2025년) 드디어 의미있는 상법 개정이 이뤄졌다. 1차 개정(2025년 7월)으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가 명문화됐고, 2차 개정(2025년 9월)으로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가 확정됐다. 올해 2월에는 자사주 취득 후 1년 내 의무 소각을 골자로 하는 3차 개정까지 통과됐다.
개정 상법의 핵심 조항들은 아직 시행 전이다.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법 시행 후 최초 주총부터,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는 2026년 9월, 전자주총 의무화는 2027년 1월에야 적용된다. 올해 3월 주총은 1차 개정 일부만 반영된 첫 번째 시험대였을 뿐이다.
개정 상법의 효과를 판단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곧 시행될 상법 개정 효과를 극대화하는 기폭제가 바로 거버넌스 코드다. 개정 상법이 지향하는 ‘규범’을 행동주의 기관투자자가 촉매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거버넌스 코드가 필요하다.
2023년 일본에서 도쿄 증권거래소가 전 상장사에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이행을 공식 요청했을 때, 행동주의 투자자인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일본 기업들의 상당 지분을 확보해 자본효율과 지배구조 개선을 촉구했다. 정책이 만들어지자 행동주의가 적극적으로 나서 기업을 타겟팅했고, 그 효과는 매우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엘리엇이 일본 기업을 타겟팅할 수 있었던 건, 거버넌스 코드가 “기업은 주주 요구에 답해야 한다”는 규범을 이미 시장에 깔아놨기 때문이다.
개정 상법과 VIP자산운용 같은 행동주의 투자자가 존재해도 거버넌스 코드가 없으면 대원산업같은 기업은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거버넌스 코드는 제도와 투자자 사이의 빈틈을 메우는 핵심 요소인 것이다.
지금 시작해야 하는 이유
일본의 사례가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기업 지배구조 변화에 1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점이다. 2015년 코드를 도입했는데 2024년에 진짜 변화가 가시화됐다.
한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진지하게 원한다면 거버넌스 코드에 대한 논의를 지금 시작해야 한다. 개정 상법의 효과가 시작되는 지금이 적기다. 밸류업 프로그램과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요구, 이 모든 것들이 맞물려 기업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거버넌스 코드가 필요하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 진단은 이미 끝났다. 지배주주 중심 구조, 낮은 주주환원, 불투명한 자본배분. 해법도 하나씩 쌓이고 있다. 밸류업 프로그램, 3차에 걸친 상법 개정, 스튜어드십 코드 강화. 그런데 퍼즐 한 조각이 여전히 빠져 있다.
바로 기업이 주주에게 답할 의무다.
지금 한국 자본시장에서 기업에게 가장 쉽고 이로운 선택은 “무시하는 것”이다. 소액주주의 요구를 외면해도 아무런 비용을 치르지 않는다.
거버넌스 코드가 하루아침에 한국 주식시장을 바꿔놓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기업들이 침묵 뒤에 숨지는 못하게 할 것이다. 거버넌스 코드가 그 선택에 비용을 부과하는 장치다.
대원산업 관련 참고[‘4100억원이 잠긴 금고’—이 주식이 오를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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