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어느 날, 스탠리 드라켄밀러는 보스의 사무실에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조지, 오늘 밤 55억 달러 규모 영국 파운드화를 팔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겠습니다.”
‘조지’는 그 유명한 조지 소로스였다. 소로스의 제자였던 드라켄밀러는 당시 소로스 퀀텀 헤지펀드의 수석 펀드매니저를 맡고 있었다. 55억 달러는 그의 펀드 자산 100%를 의미했다. 펀드가 가진 돈 전부를 단 한 번의 위험한 투자에 몰빵하겠다는 것이다.
소로스가 답했다.
“내가 들어봤던 운용 방식 중 가장 말도 안되는 짓이군.” 그리고 말했다. “200%를 걸어야지.”
영란은행을 무너뜨린 남자
당시 영국 파운드화는 변동환율제가 아닌, ERM(유럽환율메커니즘)이라고 하는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일종의 환율 밴드제) 하에 있었다. 1992년 영국과 독일의 경제 상황이 엇갈리면서 파운드화는 하락세였지만 영국 정부가 인위적으로 떠받치던 형국이었다.
드라켄밀러는 이 환율이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영란은행은 지속 불가능한 환율 페그제를 억지로 유지하고 있지만 투기 세력이 압박하면 결국 무너질 거라 봤다. 소로스는 이에 동의했고 한 술 더 떠 200%를 베팅했다.
퀀텀 펀드는 파운드에 대규모 공매도 포지션을 잡고 독일 마르크를 사는 거래를 준비했다. 소로스의 퀀텀 펀드 외에도 다른 투기자금도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파운드 매도 물량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92년 ‘검은 수요일’. 영국 정부는 엄청난 양의 파운드화를 매수하며 방어를 시작했다. 파운드가 계속 대폭락하자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10%였던 기준금리를 즉시 12%로 인상한 것이다. 그래도 파운드화가 안 잡히자 다음날부터 15%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시장은 영국경제가 15% 금리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꿈쩍하지 않았다.
파운드화는 결국 폭락했고 소로스는 ‘영란은행을 무너뜨린 남자(The man who broke the Bank of England)’라는 별명을 얻었다.
위대한 투자자에게 필요한 첫 번째, 행운
최근 드라켄밀러는 미국 재무부의 국채 바이백을 비판하는 내용을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했다. 미국 정부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으로 다시 한번 드라켄밀러가 시장의 화제가 되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무엇이 위대한 투자자를 만드는가?’라는 주제의 Buttonwood 칼럼을 선보였다. Buttonwood는 이코노미스트지의 금융시장 전문 코너다.
다음은 칼럼 일부를 번역, 요약한 내용이다.
드라켄밀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소로스가 위대한 투자자에게 필요한 두 가지 핵심 덕목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승산이 있는 기회를 알아보는 지혜, 그리고 그 기회에 전 재산을 걸 수 있는 배짱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소로스가 그날 보여준 것에는 중요하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두 가지 요소가 더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행운과, 확실히 별난 성격이다.
소로스에게 행운이 따랐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장기적으로 파운드화 페그제(고정환율제)가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을 정확히 봤다. 그리고 은행 트레이더들과 헤지펀드가 소로스 편에 가세하는 순간 어쩌면 승리는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다른 헤지펀드들이 소로스와 반대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다른 트레이더들이 다같이 중앙은행에 편에 서서 소로스를 압도해버렸을 수도 있다.
오늘날 ‘제2의 소로스’를 꿈꾸는 투자자들에게도 행운은 필요하다.
애널리스트의 종목 추천을 조합해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펀드매니저는 추천 종목 중에서 ‘맞는 것’을 골라내길 바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애널리스트가 남들이 모두 놓친 잠재력 있는 종목을 제대로 찾아냈다 해도, 나머지 시장 참여자들이 결국 그 사실을 알아줘야만 그 주식은 시장을 이기는 수익률을 낼 수 있다.
투자 스타일을 선택하는데도 행운이 필요하다. 반 세기 전 워런 버핏은 가치투자로 슈퍼스타가 됐다.
하지만 지금 가치투자는 한 펀드매니저의 표현을 빌리면 “해고당하고 싶은 펀드매니저나 하는 짓”이 돼버렸다.
아무리 정교하고 영리한 투자전략이라도 한 펀드매니저의 커리어를 망가뜨릴 만큼 오랫동안 시장을 밑돌 수 있다.
위대한 투자자에게 필요한 ‘모순’
위대한 투자자가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유별남(oddness)이다.
자신의 전략이 시장에서 계속 먹히지 않고, 고객들이 믿음을 잃어가는 상황에서도 그 전략을 고수하려면 단순히 고집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더구나 금융시장은 현실과 달리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동의하는 것이 곧 현실이 되는 세계’다. 그런 곳에서 버티려면 훨씬 더 특이한 성격이 필요하다.
또 끝까지 버티는 것이 정답이 아닐 때, 위대한 투자자는 자기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조지 소로스는 1970년대부터 수십 년 동안 큰 돈을 걸었다. 그렇게 오래 살아남으려면 언제 끝까지 들고 가야 하는지, 언제 접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위대한 투자자는 위험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손실을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오만함과 겸손함의 결합이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상황이 바뀌는 순간, 그 포트폴리오의 어떤 자산이라도 즉시 버릴 수 있을 만큼 거리를 둘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자질은 보통 한 사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한 사람이 이 모든 자질을 다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상당히 특이한 인간일 것이다.
그러니 훌륭한 펀드매니저를 찾고 있다면, 주사위를 던져 계속 높은 숫자를 뽑아낼 수 잇는 괴짜를 찾아라. 아니면 그냥 다 잊고 인덱스 펀드를 사라.
천재에게도 시장은 어렵다
이코노미스트의 버튼우드 칼럼의 핵심은 위대한 투자자에게 요구되는 자질들이 서로 모순된다는 얘기다.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해도 버티고 베팅하는 고집이 있어야 하는데, 동시에 내가 틀렸다는 증거가 나오면 즉시 생각을 뒤집는 유연성도 있어야 한다.
즉 엄청난 위험을 감수할 배짱이 있으면서 손실을 냉정하게 잘라낼 자제력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투자스타일이 시장이 지금 요구하는 투자 스타일과 맞아떨어지는 운까지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식운용을 업으로 하는 펀드매니저나, 투자의 대가가 아닌 일반 개인 투자자에게는 더 어려운 일이다.
주가가 떨어졌을 때, 또는 많이 올랐을 때 남들과 다른 판단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평범한 개인이 본성에 어긋나는 판단을 하는 것은 더 그렇다. 보통의 투자자가 남들이 모두 주식을 팔아치우는 폭락장에서 매수에 베팅하는 과감함과 확신이 틀렸다는 판단에 빠르게 물러서는 담대함을 모두 갖추기는 어려운 일이다. 펀드매니저에게도 어려운 일이 일반인에게 쉬울 리 없다.
그러니 이코노미스트의 조언처럼, 그런 자질을 갖춘 펀드매니저를 찾아내 돈을 맡기거나 지수에 투자하는 수밖에 없을 지 모르겠다. 아니면 최소한 자기 자신이 모순되는 두 자질을 겸비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오래 일했지만 상호 모순되면서 동시에 복합적인 위대한 투자자의 자질을 모두 겸비한 펀드매니저나 투자 대가는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여의도에서 만났던 분들은 모두 위대한 분들이었다. 그 중에는 당연히 ‘괴짜’로 보이는 투자자도 꽤 있었다.
하지만 천재적인 인사이트와 감탄이 나올 만큼의 똑똑함,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인내력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행운이 그의 편이 아닌 때가 있었다. 분명 저평가된 우량 기업이면서 실적도 탄탄하고 강력한 해자까지 갖췄는데도 주가가 안 오르는 기업이 있었다. 그런 기업을 믿고 오래 버티면서 펀드매니저의 수심은 깊어져만 갔다.
시장은 늘 천재들에게 혹독한 가르침을 준다. 아, 참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