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씨의 SK하이닉스 수익률이 누적 7000~9000%에 달한다고 한다. 그녀는 이미 부자가 됐지만 어린 시절부터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여전히 맘 놓고 돈을 쓰지 못한다.
그녀는 이제 만 87세이고 경도인지장애(치매 전 단계) 판정까지 받았다. 얼마나 더 살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돈을 잘 쓰지 못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돈을 악착같이 모은 경험으로 “그게 몸에 뱄다”고 한다. 남편의 유언조차 “당신도 이제 돈 좀 쓰고 살아라”였다고 할 정도다.
자산이 넉넉한데도 돈을 못 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전원주씨처럼 돈을 아끼고 아끼는 습관이 굳어버린 경우, 가난의 기억이 돈 쓰는 것을 공포로 만들어버린 경우다. 두 번째는 불안이다.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산이 10억, 20억, 30억원이 넘어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한다. 불안한 마음에 아끼는 것이 습관으로 고착되며 죽기 직전까지 이어진다.
‘한번 뿐인 인생, 맘껏 즐겨라!’ 한국에서는 이런 주장을 주로 비난하거나 한심하게 생각한다. 전쟁에서 벗어난 지 겨우 70여 년, 7080세대와 6070세대는 6.25시절 가난의 기억 때문에 지갑을 열지 못한다. 아끼고 또 아끼고 모으는 것만이 그들의 생존법이었다.
문제는 죽을 때가 다가왔는데도 돈을 모으기만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아끼고 아낄 것인가?
생계가 해결됐고 노후를 감당할 자산도 마련됐다면 남은 생애 동안 자산만 불리는 것이 최선일까. 10억원을 20억원으로, 20억원을 30억원으로 만들기 위해 벌고, 아끼고, 모으는 동안 잃어버리는 건 없을까.
이런 사람들에게 미국의 헤지펀드 매니저 빌 퍼킨스(Bill Perkins)는 아주 도발적인 답을 내놓는다.
“다 쓰고 죽어라(Die With Zero)”
2020년 퍼킨스는 ‘Die With Zero’ 파격적인 제목의 책을 냈다. 흥청망청 쓰다 죽으란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도발적인 제목과 달리 이 책은 인생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돈을 다시 삶으로 바꿔라
재테크의 표준 공식은 근로소득을 저축하고, 이를 투자해 더 많은 돈을 보유하는 것이다. 퍼킨스는 여기서 마지막 단계가 빠졌다고 지적한다.
그는 시간과 노동을 투입해 모은 돈으로 삶의 ‘경험, 관계, 시간’을 다시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평생 일해 모은 돈을 결국 사용하지 못한 채 죽는다면, 돈으로 바뀐 삶의 일부를 다시 돌려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다 쓰고 죽어라(Die With Zero)’는 0원까지 돈을 진짜 다 쓰고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돈만 모으지 말고 돈을 써서 ‘삶의 만족’을 극대화하라는 얘기다.

돈은 원래 교환수단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돼 버렸다.
돈의 효용은 ‘미래의 소비 가능성’에서 나온다. 1억원을 가지고 있다면 이 돈으로 앞으로 주거, 교육, 여행, 휴식 등을 준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돈을 보유하는 것 자체도 안정감과 선택권이라는 효용을 준다.
문제는 그 안전망을 넘어선 돈을 모았어도 계속해서 축적을 이어간다면 수단이 곧 목적이 돼 버린다. 돈을 벌기 위해 현재를 갈아 넣으면서, 미래의 가능성을 쌓기 위해 지금의 삶을 희생하며 인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추억도 배당을 한다
빌 퍼킨스는 돈의 목적은 돈 자체가 아니라 ‘삶의 경험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기억 배당(memory dividend)이다. 45세 가장이 자녀들과 함께 멋진 여행을 했다면 여행하는 동안 짧게 즐기고 돈 쓰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여행을 준비하면서 설렌 마음과 여행에서 만든 추억을 50세에도 이야기하고, 55세에도 기억하고, 60세에도 회상한다. 자녀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즐거운 기억을 되살리며 그 경험에서 계속해서 효용을 얻는 것이 바로 기억 배당이다.
사실 나는 저자의 ‘기억 배당’이란 개념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바로 경험을 소비가 아닌 장기간의 현금흐름 같은 효용을 발생시키는 자산으로 해석한 시각 때문이었다.
마치 10억원의 자산에서 매월 300만원의 현금흐름이 발생하는 것처럼, 경험에서 수 십 년 동안 반복되는 행복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알뜰살뜰 재테크를 잘하는 사람은 지금 어떤 경험에서 300만원을 아끼면 이 돈이 20년 뒤에는 얼마가 될지 계산해본다. 300만원을 해당 경험에 소비하면 가계부에는 -300만원이 된다.
하지만 경험의 회계장부에서는 그 기억이 계속해서 배당을 지급한다.
300만원을 가족여행에 소비하면, 여행을 준비하면서 느낀 설렘부터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 놀라움과 풍경의 아름다움, 여행지에서의 에피소드와 해프닝, 그리고 행복한 순간을 반복해서 체험한다. 돌아와서 사진을 보고 몇 년 후에 “그때, 기억나?”하며 다시 이야기를 꺼낸다. 그 기억은 가족사의 한 조각이 된다.
300만원을 드럼 배우기에 투자하면, 처음 스틱을 잡고 박자를 맞추지 못해 헤매던 순간부터 조금씩 리듬을 익히고 좋아하는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는 성취감을 경험한다. 합주를 하거나 작은 무대에 서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몇 년 뒤 “그때 내가 드럼에 푹 빠져 있었지”라고 떠올릴 수 있다. 음악에 대한 감수성은 물론 뭔가에 몰두하는 기쁨을 누렸다는 기억도 남는다.
하지만 돈과 추억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기억을 만드는 행위, 경험에는 시간이라는 강한 제약이 걸려있다. 돈은 미래로 가져갈 수 있지만 시간은 절대로 미래로 가져갈 수 없다. 40대에 쓰지 않은 돈은 60대에 남아있지만, 40대에만 할 수 있었던 경험은 60대에 더 많은 재력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할 수 없다. 시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되돌릴 수 없으니까.
’11살 아이와 보내는 여름’은 평생 딱 한 번 뿐이다. ’60세 부모님과 함께한 사진 촬영’ ’20년 지기 친구와 30살에 함께한 여행’도 오직 그 때만 가능하다.
기억 배당(memory dividend)이라는 개념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인상적인 개념이다. 알뜰살뜰 저축하는 사람에게 “돈 좀 쓰고 살아”라는 말은 그냥 소비를 합리화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기억 배당을 이해하면 어떤 소비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삶을 구성하는 자산이 된다는 걸 알게 된다.
경험에 유효기간이 있다
퍼킨스는 돈만 중요한 게 아니라 ‘돈, 시간, 건강’ 3가지 자원이 풍부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자원이 풍부한 시기는 생각보다 굉장히 짧다.
그래서 그는 ‘Time Buckets’을 말한다. 버킷리스트에 유효기간을 붙이는 행위다. 인생의 버킷리스트에 이 경험을 언제 해야 하는지를 정하고 실천하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크루즈 여행은 60대, 70대에도 가능하다. 하지만 고산 트레킹은 50대 이전에 하는 것이 낫다. 어린 자식과 함께 디즈니월드나 에버랜드, 워터파크에 가는 경험도 아이가 어릴 때만 가능하다. 꼭 대단한 여행이 아니더라도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집에 걸어오거나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일, 새로운 커리어에 도전하는 일, 관심 있는 분야의 대학원에 진학하는 일 등 모든 경험에는 적합한 시기라는 타이머가 붙어있다.
돈에 기회비용이 있는 것과 비슷한 셈이다. ‘언젠가 할 수 있는 경험’과 ‘지금이 아니면 못하는 경험’의 가치가 다르다.
돈을 아끼기 좋아하는 사람은 여행을 취소하면서 200만원을 아끼고, 경험을 미루는 손실은 0원으로 계산한다. 하지만 사라진 경험이 0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유산 상속에 대해서도 자녀에게 줄 돈도 죽은 뒤에 주지 말라고 조언한다.
부모가 90세에 사망해 60세 자녀에게 2억원을 물려주는 것과, 자녀가 30~40대일 때 2억원을 주는 것의 효용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집을 사고 아이를 키울 때 자산을 물려주면 자식들에게 더 큰 삶의 가치로 환원된다.

부자로 죽지 마라
대부분의 부자들은 죽기 직전 순자산 정점을 이룬다. 가령 30세에 30억, 40세에 40억, 50세에 80억, 60세에 100억, 80세에 200억원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성공적인 자산증식으로 본다.
퍼킨스는 “왜 80세가 인생에서 가장 부자인 날이어야 하나?” 질문한다. 그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 순자산 정점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이후에는 돈을 삶으로 전환시키면서 자산을 줄이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빈손으로 죽어라(Die with Zero)”다.
미국에서도 은퇴층이 계좌잔고를 보존하기 위해 돈 쓰기를 꺼리는 현상이 있다. 2026 알리안츠 조사에 따르면 실제 은퇴자들 가운데 39%는 자산을 보존하기 위해 소비를 주저했고, 은퇴자의 32%가 모은 자산을 꺼내서 쓰는 행위에서 죄책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미국에서 재무 설계의 목표는 오랫동안 자산 축적(accumulation)에 최적화돼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산 소진(decumulation)이 필요한 상황이 되자 문제가 생겼다. 은퇴 후에는 재산을 꺼내 써야 하는데, 고령의 은퇴자들에게 재산을 갉아먹는 느낌이 매우 불편했던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부동산에 대한 자산 편중이 매우 심해 노인 가구의 자산 대부분이 집에 묶여있다. 이들은
주택 매도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다. 현금흐름이 부족하고 세금이 부담스러워도 깔고 있는 30억, 50억 짜리 아파트를 매도하는 건 원치 않는다. 재무적으로는 실제로 부유하지만 소비에 사용할 가용 현금은 거의 없는 가구가 돼 버린다.
사회적으로도 고령층의 자산이 비유동자산인 집에 잠기면 가계 소비 전체와 경제의 활력, 세대 간 자산 이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얼마면 충분한가?
결국 “Die with Zero”는 돈 좀 쓰고 살라는 것. 물론 저자의 주장은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고 자산을 충분히 축적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한 달 생활비도 빠듯한 사람에게 ‘기억 배당’을 운운하며 취미나 여행에 투자하라고 하면 재무적으로 터무니없는 조언이 된다.
그런데 ‘충분히 자산을 모은 사람’이라는 기준이 문제다. 한국적 맥락에서 ‘충분히’의 기준이 너무 모호한 것이다.
요새는 10억원도 불안하고, 20억원도 불안하다고 한다. 순자산이 30억원 돼도 그냥 ‘서울에 20억원 집 한 채에 금융자산 10억원 가진 중산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40대 기준 순자산 상위 1%의 기준은 약 32억원이지만 30억 자산가는 본인이 상위 1% 수준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 주변에는 다 부자들 뿐이다”고 얘기한다.
혹자는 “서울 집값이 얼만데 30억원이 넉넉하다는거냐?”고 묻는다. 실제로 서울 집값은 최근 몇 년 새 지나치게 상승했다. 하지만 이는 절대적 생활수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충분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은 객관적인 충분함과 주관적인 충분함의 괴리가 큰 사회다.
결국 ‘충분함’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돈의 축적을 삶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건 어렵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스스로 정하는 기준만 있을 뿐이다.
돈을 모으는 데도 적절한 시기가 있고, 돈을 쓰는 데도 적절한 시기가 있다.
전원주씨처럼 상당히 많은 부를 축적했는데도 계속해서 “부족하다”고 느끼다 80대를 맞기 전에, 돈을 쓰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놓치지 말자.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