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의 백화점 호황, 경기는 최악이라는데…

459aaedb e2a2 4ac1 b0f1 a2cd8e9442b8“경기가 너무 안 좋다”고 한다. 정말 경기는 최악일까. 뉴스에는 내수 침체, 소비 부진, 자영업자 폐업, 사무실 공실 얘기가 넘쳐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백화점 3사(롯데·신세계·현대)는 올해 1분기(1~3월) 나란히 역대 최대 매출을 찍었다고 한다.

주식시장에서는 모두가 반도체 주식에 열광하고 있다. 하지만 뒤에서 소리 없이 부활한 주식이 있었으니 바로 백화점주다.

신세계 현대백화점 롯데쇼핑, 국내 백화점 빅3의 주가는 물론 이마트까지 주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고급 패션브랜드를 유통하는 한섬, 신세계인터내셔날도 마찬가지다. 소비가 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주식시장 강세로 인한 부의 효과(wealth effect)가 드디어 시작인가?

부의 효과(wealth effect)란 자산 가격(부동산, 주식)이 상승하면서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지난 수 년 간 아파트값 상승이 이어졌으나 부의 효과는 크지 않았다. 고물가와 고금리에 2023년~2024년 소비경기는 10년래 최저 수준이었다. 특히 필수소비재가 아닌 패션 업종은 경기 부진에 치명타를 입었다.

하지만 작년 3분기부터 분위기는 반전됐다. SK하이닉스를 필두로 반도체 기업 실적이 회복되면서 주식시장에서 증시 랠리가 시작됐다. 연말에 4000을 돌파한 코스피 지수는 최근 8000선을 넘보고 있다. 주식은 부동산과 달리 매일 계좌 잔고가 불어나고, 현금화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SK하이닉스의 대규모 성과급 지급도 힘을 보탰다. 부의 효과로 소비 회복이 시작된 것이다.


20년간 없던 백화점 호황이 갑자기 오다니…

작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백화점은 부진했다. 57개 국내 백화점 점포 합산 매출은 전년 대비 고작 0.3% 증가, 사실상 제자리였다.

7월 이후 분위기는 갑자기 달라졌다. 백화점이 모든 오프라인 유통 채널 중 가장 높은 4.1% 성장률을 기록하며 반등했다. 10월 이후에는 전국 모든 지역 점포가 동반 성장하는 국면에 진입했다. 상반기까지는 강남·잠실 같은 상위 점포만 살아있었는데 4분기부터는 지방까지 살아났다. 지방 백화점까지 매출이 살아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올해 1분기에는 백화점 매출 회복이 더 가파르게 나타났다. 외국인 인바운드 영향이 두드러졌는데 롯데백화점 전체 외국인 매출이 92% 급증했다. 지점별로 롯데백화점 명동점, 신세계 본점, 더현대서울(여의도)의 외국인 매출이 각각 103, 140%, 121%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명품(럭셔리) 외에도 중산층 소비 중심의 일반 패션 매출이 증가한 것이 돋보였다. 국내 백화점의 경우 수수료율이 낮은 명품보다 일반 패션 부문이 고마진에 해당된다. 고마진 카테고리인 패션 매출이 늘면 영업 레버리지가 커진다.

1분기 백화점 3사는 나란히 역대 최대 매출을 찍었다. 백화점 부문만 따로 떼면 신세계 영업이익은 30.7% 뛰었고 현대백화점 영업이익은 39.7% 급증했다. 롯데백화점 영업이익도 47.1% 늘었다.

작년 하반기에는 신세계 주가가, 올 상반기에는 롯데쇼핑 주가가 치고 나가는 중이다. 4월에만 현대백화점, 신세계, 롯데쇼핑 주가가 일제히 20~30% 올랐다.


내국인+외국인이 동시에 지갑 열었다 

서정연 신영증권 연구위원은 유통 전문 애널리스트로 오랫동안 유통 업종을 맡은 베테랑이다. 그녀는 최근 유통업 보고서에서 ’20년래 없던 호황’이라며 유통업종에 적용할 밸류에이션을 10배에서 12배로 일제히 상향한다고 밝혔다.

신영증권에 따르면 백화점 지점별 매출 신장률은 지난해 10월부터 두 자릿 수를 기록하며 본격적인 호황의 신호를 보였다. 지난 2월에는 25.6%라는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코로나19 기간 예외를 제외하면 20년래 없는 호황이 온 것이다. 명품 쇼핑 급증, 패션 소비 증가, 구매횟수 증가가 동반된 호황이다.

서정연 연구위원은 “백화점 특수의 기저에는 국내 가계의 금융자산 증가와 외국인 인바운드가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식시장 상승으로 인한 ‘부의 효과’와 원화 약세로 인한 외국인 인바운드 효과가 동시에 맞물리며 백화점 매출 급증으로 이어진 것이다. 작년 하반기 국내 일부 대기업의 대규모 성과급 지급도 소비 회복에 힘을 더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 연구원은 “가계 순자산에서 주식 관련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4분기에 이미 최고치를 경신했고 지난 3월에도 개인 순매수 금액이 34조원으로 자본시장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했다. 이어 “금융자산 증가는 부동산보다 유동화가 쉽고 빠르기에 소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손익이 실시간 수치화되며 심리적 부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원화 약세는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에서 명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유인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방한 관광객 증가는 면세점 매출로 이어졌지만 이제는 원화 약세로 백화점 쇼핑이 매력적인 상황이 펼쳐지면서 백화점 매출 증가로 연결되는 흐름이다.

요약하자면 내국인과 외국인이 동시에, 서로 다른 이유에서 백화점 쇼핑을 시작한 것이다. 이는 올해 1분기 백화점 3사의 역대 최대 매출로 이어졌다.


일본 백화점이 먼저 보여준 길

갑작스런 백화점주 재평가에 유통 업종 담당 애널리스트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주식시장 호황과 원화 약세로 인한 특수는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앞서 옆나라 일본에서는 ‘엔저 호황’으로 일본 백화점주의 리레이팅이 진행된 바 있다. 원화 약세로 인한 외국인 관광객 유입과 주식시장 강세가 맞물리면서 한국 백화점주가 비슷한 재평가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22년 이후 일본 백화점 주요 기업인 이세탄미쓰코시, 다카시마야 등은 2~3년새 주가가 2~4배 가량 뛰었다. 배경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엔저 가속화였다. 달러/엔이 150엔을 뚫고 올라가면서 외국인 입장에서 일본 백화점은 상시 ‘세일 중인 명품샵’이 됐다. 도쿄 이세탄에서 샤넬이나 루이비통을 사면 파리나 뉴욕보다 30~40% 저렴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두번째는 바로 이 수요가 일시적인 관광 특수가 아니라 평시 수요로 정착됐다는 점이다. 2023년 이후 엔화가 일부 회복하는 구간에서 이세탄·다카시마야 외국인 매출이 꺾이지 않았던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환율 때문이 아니라 “일본 백화점에 또 간다”는 목적으로 일본에 가기 시작했다. 엔저 메리트에 처음 한 번 가봤는데 일본의 매력에 빠져, 재방문하게 된 셈이다. 일본 백화점 매출 1위 이세탄 신주쿠점의 외국인 매출 비중은 과거 5%에서 15~20%까지 올라갔다.

백화점 입장에서는 내수 부진을 상쇄하는 새로운 수익원이 생긴 것이다. 이는 일본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침체된 유통주를 부활시키는 중요한 계기였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원화 약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K컬처 강세가 맞물리며 외국인 입국자수 증가가 가파르다. 특히 1분기 외국인 관광객의 백화점 소비가 수도권을 넘어 지방 백화점에서도 나타난 것은 특이점이다. 이는 한국 백화점주에 부과될 PER 배수의 상향으로 이어질 수 있어 특히 주목할 점으로 보인다.

물론 아직까지는 ‘가능성’에 그친다. 원화는 엔저와 달리 환율 변동성이 훨씬 큰 편이다. 지금의 백화점 호황은 2025년 상반기까지 부진으로 인한 기저효과도 크다. 환율과 외국인 관광객 인바운드 유입을 면밀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으며 일본식 장기 리레이팅이 재현될 수 있을지는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한다.


비대칭적 경기 회복 신호: 나는 불황, 너는 호황

건물마다 사무실이 텅텅 비고 자영업자 폐업이 속출하는데 백화점 호황이라니. 참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최악의 불황 속에 살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억대 성과급을 들고 백화점을 방문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경기다.

반도체 업종 호황, 그리고 그로 인한 주식시장 강세에 따른 제한적 낙수효과는 이미 시작됐다. 백화점 부문별 매출에서 확인할 수 있듯 명품 외에도 중산층 소비가 주로 일어나는 일반 패션 매출이 크게 늘었다. 생필품을 파는 이마트도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14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반도체 호황에서 시작된 온기가 장바구니 소비에도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지금의 한국 경제는 하나의 경기가 아니라 여러 개의 분절된 경기가 다양한 집합으로 존재하는 상태로 보인다. 최근 몇 년 간 이어진 부동산, 주식 등 자산 가격 상승이 양극화를 넘어 다극화를 초래하고 있다. 누군가는 폐업하고 누군가는 억대 성과급을 받고, 누군가는 삼성전자 주식이 3배 올라 함박웃음을 짓고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었다.

반도체 호황과 주식시장 강세로 경기는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다만 아직은 그 온기가 사회 전체로 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코스피 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향해 전진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은 경기 회복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 백화점 쇼핑백을 가득 들고 나오는 가족들과 가게를 폐업하고 치킨 한 마리 시켜 먹기도 어려운 가족이 공존하는… 호황과 불황이 함께하는 기이한 이중적 풍경이 지금 한국 경제의 모습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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