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은 피아노 신동이었다. 13살에 한예종 음악원 예술영재로 들어가 14살에 클리블랜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김연아도 어린 시절부터 두드러졌다. 14세부터 국제 주니어 무대 정상권에 올라, 15세에 우승을 차지했다.
12살짜리 바이올린 신동도, 10살 체스 천재, 9살 수학 천재도 있다. 그런데 나는 주식시장에서 ‘가치투자 신동’이라는 말은 못 들어봤다.
하버드와 MIT, 스탠퍼드의 수학과 공학, 물리학 천재들이 시장에 도전했다. 일부는 놀라운 투자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분야처럼 어린 시절부터 압도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투자 신동’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워런 버핏조차 ‘투자의 대가’라고 불리지만 어릴 적부터 ‘투자의 천재’라 불리진 않았다.
왜 주식시장에는 모차르트가 없을까. 각 분야의 천재가 시장에 도전했지만 시장은 난공불락의 성처럼 천재를 무력화 시키곤 했다. 투자에는 애초에 천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시장이 천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장…집단 지성인가, 집단 광기인가
주식시장에는 세계 최고의 두뇌와 자본이 함께 참여한다. MIT 수학자, 하버드 경제학자, 스탠포드 물리학자와 데이터 과학자, 그리고 월스트리트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 초단타 알고리즘 전문가들까지…주식시장에는 IQ 140, 150의 천재들이 득실거린다.
범재의 수는 더 많다. 레버리지 ETF로 한탕을 꿈꾸는 한국의 개미들부터 퇴직금을 매달 꾸준히 S&P 500에 적립하는 수많은 미국의 직장인들도 있다. 그리고 천재와 범재에 이어 바보들까지 이곳, 주식시장에서 지상 최대의 ‘머니 게임’에 참전한다.
주식시장은 이런 천재와 범재들, 그리고 바보의 생각을 모두 반영한 ‘의지의 총합’에 의해 움직인다.
초단타 투자자와 초장기 투자자가 동시에 매매를 한다. 기업가치를 계산해 최대한 저평가된 담배꽁초 기업을 줍는 사람과 차트만 보며 단타치는 사람도 나란히 앉아있다. 폭락장에서 공포에 질려 던지는 사람과 탐욕스럽게 주식을 매수하는 사람이 동시에 존재한다. 국부펀드와 연기금, 헤지펀드까지 막대한 자금력으로 물량 공세를 퍼붓는 거대 펀드도 고래처럼 들어와 있다.
이들의 참여는 결국 ‘가격’이라는 하나의 숫자로 나타난다. 이렇게 도출된 가격은 때로는 ‘집단 지성’의 결과처럼 합리적 수준에 머문다. 허나 가끔은 ‘집단 광기’처럼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미쳐 날뛴다.
모든 참가자들의 의지의 총합이 집단 지성이 될지, 집단 광기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모든 플레이어의 판단과 욕망과 공포가 숫자로 압축될 뿐이다.
폭락장 또는 폭등장에서 집단의 의지는 거의 괴물이 된다. 괴물은 현명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현명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시장은 가끔씩 집단적으로 미쳐버린다.
세계적인 피아노 콩쿨에서, 체스 대회에서, 축구 경기에서, 천재는 천재를 상대한다. 하지만 주식시장에서는 내가 천재라고 해도, 천재와 범재와 바보가 뒤엉켜 만들어진 알 수 없는 괴물을 상대해야만 한다.
시장을 이기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이유는, 내가 ‘무엇이 옳은가’를 맞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기업이 성장하는 미래와 저평가가 99% 확실하다 해도 충분치 않다. 시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까지 맞춰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기업의 미래를 시장이 어떻게 생각하며,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까지 판단해내야 한다.
홉스의 표현을 조금 빌리면 주식시장이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다. 총칼 대신 매수와 매도 버튼을 통해 막대한 ‘쩐의 전쟁’이 벌어진다.
처절한 생존 게임의 장…목표는 ‘살아남는 것’
주식시장을 제로 섬(zero-sum) 게임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 돈을 벌면, 누군가 돈을 잃는다는 것이다. 단일 거래에서는 맞는 말이다. A가 10만원에 산 주식을 15만원에 팔고, 그걸 B가 매수한 뒤 주가가 10만원으로 하락하면, A가 낸 수익 5만원은 곧 B의 손실처럼 보인다.
사실 주식시장은 전체로 보면 플러스 섬(positive-sum) 게임이다. 상장 기업들이 잉여이익을 자본으로 축적하고 주주에게 배당으로 지급하면서, 성장에 따라 주주에게 돌아가는 부가 증가한다. S&P 500 지수처럼 장기적으로 지속 성장하는 시장에서는 투자로 누군가 돈을 벌었다고 해서, 누군가 반드시 돈을 잃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장기 상승장이나 강세장에서는 모두가 승자가 된다. 실제로 초강세장이 전개될 때 거의 모든 투자자의 수익률이 플러스로 나타나는 일이 발생한다. 경제 성장이 이어지는 주식시장 내부에 머무는 것 만으로도 서서히 모두가 주가 상승의 수혜를 받게 된다.
시장은 제로섬 보다는 서바이벌 게임에 가깝다. 종종 일부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완전히 퇴장 당하곤 한다. 수익이든 손실이든 살아남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과도한 레버리지 사용은 가격 폭락시 마진콜로 이어진다. 자산 전체의 강제청산이 일어난다. 몰빵 투자 역시 상장폐지 같은 이벤트 발생시 영구적 자본손실로 귀결된다. 폭락장에서 공포에 주식을 투매하는 것도 회복 기회를 상실하는 행위다. 이런 베팅을 몇 번 반복하면 파산에 이른다.
올라가는데 1년 걸려도 내려오는 데는 1달이면 충분하다. 연 100% 수익은 3년 연속 냈어도, -100% 수익률이 발생하면 모든 자산은 사라진다. 여러 번 시장에서 승리한 사람도 -100% 한번이면 게임 오버다. 반면 매년 엄청난 수익은 내지 못하더라도 10년, 20년, 30년 동안 손실 없이 조금씩 이익을 누적해가면 ‘복리의 마법’이 부의 증식을 이뤄낸다.
그래서 워런 버핏의 투자원칙으로 잘 알려진 말은 이렇다.
“투자의 제1원칙: 절대로 돈을 잃지 마라. 제2원칙: 제1원칙을 절대로 잊지 마라” (Rule No. 1: Never lose money. Rule No. 2: Never forget Rule No. 1.)
천재는 없다…그렇다면 투자에 유리한 기질이 있을까
워런 버핏은 사실 어릴 때부터 사업도 투자도 잘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투자의 신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는 ‘투자의 대가’로 존경받는다.
버핏의 위대함을 단순히 ‘높은 수익률’로 보면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시장의 괴물같은 속성과 생존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위대함은 정말 오랫동안 치명적인 실패를 피하면서 복리를 지속시킨 데 있다.
피아노 연주의 천재성은 1시간 동안 발휘되는 것이고, 100m 달리기의 승부는 10초 안에 난다. 축구 경기의 지속 시간은 2시간 남짓이다. 천재의 승부는 짧고 명확하다.
투자 세계에서는 10년 동안 잘해도 천재성을 증명하기 어렵다. 심지어 10년의 투자 성과가 그저 운 덕분일 수도 있다. 10년 동안 쌓은 성과도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손실로 무너질 수 있다.
투자에 천재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기간 지속되는 반복 게임에서 승리하는 기질이 존재하는가.
있다. 투자에서 손실이 발생했을 때 확률적 사건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기질, 장기투자를 하면서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기질, 남들과 다른 포지션을 오래 들고 가면서도 사회적 조롱과 압력 또는 고독을 견디는 기질 등이다.
이런 기질은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성향’에 가깝다. 손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지루함을 견디고, 타인의 시선을 덜 신경 쓰는 기질이다.
하지만 이런 기질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나쁜 판단을 덜 하게 해주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지만, 이런 사람이 잘못된 종목을 보유하면 그냥 나쁜 회사를 오래 들고 있는 사람이 될 뿐이다.
‘좋은 판단’을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뛰어난 기업, 기라성 같은 기업이 될 종목을 알아보는 판단력이다. 어떤 산업구조가 강력한 해자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경영진이 신뢰할 만한 사람들인지, 10년, 20년 뒤에 이 기업이 어떤 그림으로 성장해있을지, 어떤 숫자가 왜곡돼있는지 읽어내는 능력. 이것은 기질이라기보다 축적된 지식과 학습, 훈련의 영역이다.
그래서 주식투자에 적합한 기질이 있는가, 질문으로 돌아오면 그런 기질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선택을 막아주는 것에 그친다. 타고난 좋은 기질에 기업의 비즈니스를 파악하는 판단력이 더해져야 한다. 그리고 주식시장에서의 오랜 경험치까 겸비해야 한다.
주식시장은 ‘오징어 게임’ 아닌 ‘동물의 숲’
주식시장이라는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컴퓨터 게임과 달리, 최종보스인 괴물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목표는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동물의 숲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시장을 이기려고 무리수를 두는 것이 아니라, 큰 손실을 회피하며 살아남은 뒤 시장 평균에 올라타 천천히 부자가 되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투자는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수단이지 투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동물의 숲을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그 곳에 쓰러뜨려야 할 최종보스는 없다. 낚시하고, 과일 따고, 집을 꾸미고 이웃과 함께 지내며 삶을 계속 이어갈 뿐이다.
대단한 요행을 바라지 않고 30년가량 월급의 일부를 꾸준히 적립해 은퇴 자금을 충분히 확보하면, 투자 게임은 성공에 이른다. 평온한 숲에서 범재들이 살아남기 위해 추구할 수익률은 바로 시장수익률이다.
천재와 범재와 바보의 의지가 하나가 돼서 나타나는 괴물의 수익률, 그것이 바로 시장수익률이다. 시장수익률에 올라타라. 시장을 이기는 수익률을 내는 건 극소수의 용감한 전사들에게 양보하자.
일찍이 이 단순한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있었다. 인덱스펀드의 아버지 존 보글(John C. Bogle)이다. 보글은 투자의 천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투자 게임의 구조를 이해한 천재적인 발상으로 지수 상품을 창조해냈다.
보글은 생각했다. 모두가 시장을 이기려고 투쟁하고 있다. 그런데 평균적으로 계속 시장을 이기는 것은 수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왜 시장과 싸우는가? 그냥 모든 주식을 소유하라.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지 말고, 건초를 통째로 사라”
사람들은 지수 투자를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재 펀드매니저도 이기지 못해 발버둥치는 상대가 바로 시장수익률이다.
주식시장의 천재는 시장을 이길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 아니었다. 주식시장을 이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천재를 허락하지 않는 시장에서 가장 천재적인 선택은, 천재가 되길 그만두고 낚시를 하고 과일을 따 먹고 집을 보살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칼 들고 괴물과 싸우고 있는가.
2026. 8. 13일 라이프머니[LifeMone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