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부(Wealth)의 종합성적표다. 돈이 많아도 여행을 잘 가지 않는 사람도 있고, 부유하지 않아도 해외여행 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왜 여행이 부의 종합성적표라는 것인가.
부는 단순히 ‘돈이 많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유하다’는 단어와 ‘돈이 많다’는 단어는 어감이 미묘하게 다르다. ‘부유하다’는 것은 재물이 넉넉하다는 뜻에 여유가 있다는 뜻을 합친 것이다. 재물과 마음, 시간과 공간의 넉넉함을 포괄하는 의미다.
부의 ‘육각형 스펙’으로 완성되는 여행
가족과 비행 6시간 이상 장거리, 5~6일 이상 길게는 2주 이상 여행을 떠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첫째는 시간이다. 며칠을 통째로 비워야 한다. 한 회사의 대표이사나 임원이라도 자리를 오래 비울 여유가 없다면 긴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 한국의 기성세대, 60-70대 이상 부자들은 여행을 많이 가지 않았다. 산업화 세대인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부를 축적했지만 여행을 떠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런 기업 문화가 여전한 한국 기업이 아직도 많고 스스로 연차를 다 쓰지 않고 반납하는 사람도 꽤 많다. 심지어 연차를 쓰기보다 돈으로 돌려받는 걸 더 선호하는 40대 이상 부장급 직원도 많다. 연차의 가치보다 연차 보상이 더 소중한 것이다.
두번째는 체력이다. 미국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트레일에서 하이킹을 하고, 코스타리카의 정글에서 짚라인을 하고, 칸쿤 바다에서 스노클링을 하려면 건강해야 한다. 여행에서 부지런히 걸어다니며 구경하는 걸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현지 액티비티를 즐기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건강은 필수이고 평소에도 스포츠를 즐겨야 한다. 수영은 물론 트레킹, 카약, 패들보드, 스노클링 같은 액티비티를 무리 없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세번째는 화목한 가정이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살면서 대부분의 여행을 가족과 함께 가는데 가족이 있고 사이가 좋아야 즐거운 여행을 자주 떠날 수 있다. 일에 치여 가족과 멀어진 사람은 어쩌다 가는 여행이 즐겁지 않을 것이다. 특히 자녀가 초등학생이거나 사춘기를 통과하는 중학생일 때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은 가장은 늙어서는 자녀들이 같이 가려하지 않게 된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부유함인 것이다.
네번째는 부지런함이다. 앞서 언급한 시간과 체력, 화목한 가정을 모두 가진 사람이라도 게으르면 여행을 갈 수가 없다. 알차고 즐겁고 여유 있는 여행은 계획부터 쉽지 않다. 항공사를 골라 항공권을 예약하고, 숙소를 조사해서 최적의 호텔이나 리조트를 고른다. 여행자 보험을 가입하고 현지 액티비티를 예약한다. 패키지 여행을 이용하면 간편하지만, 가족에 딱 맞는 맞춤형 프라이빗 여행을 스스로 설계하는 데는 부지런함이 필수다. 특히 이런 부지런함은 곧 삶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의미하기에 중요하다.
다섯번째는 ‘아비투스(habitus)’라 불리는 문화적 소양이다. 여행의 즐거움은 아는 만큼 깊어진다. 런던 대영박물관의 로제타석이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덴두르 신전은 배경을 모른 채 봐도 인상적이지만, 그 역사와 의미를 알고 나면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세계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 역사 유적지들은 인류의 시간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행지에서 수백년의 역사가 보존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방문할 때 우리가 가진 문화적 소양은 그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소다.
마지막으로 당연히 돈이다. 장거리 비행이 필요한 여행이라면 비즈니스석이나 컴포트석을 타는 것이 당연히 더 편할 것이다. 리조트도 5성급 호텔이나, 3성급 호텔이냐에 따라 여행 경험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나라일수록 비행기 좌석과 호텔의 등급, 프라이빗 투어가 발달했고 가진 돈의 사이즈에 따라 경험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 더 편안하고 특별한 경험을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이 여섯 가지를 동시에 갖추고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은 진실로 부유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부자일 뿐 아니라 마음의 부자, 행복의 부자다. 그래서 여행은 부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자산 규모 뿐 아니라 건강, 시간, 관계, 삶의 태도까지 한 사람이 가진 부를 총체적으로 반영해준다.
그야말로 부의 육각형 스펙 아닌가.
새로운 부자의 등장
한국의 산업화 세대, 6070세대에서 부자가 된 이들은 분명 돈이 많았다. 이들은 부동산과 금융자산을 넉넉히 보유했고 자녀 교육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에는 인색했다. 휴가가 있어도 여행을 가지 않았고 개미처럼 강박적으로 일했다. 긴 여행은 사치였다.
그들이 게으르거나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세대에게 부(富)의 증명은 여행이 아니라 자산이었다. 돈을 쓰는 것보다 모으는 것이 미덕이었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덕목이었다. 여행은 ‘남는 게 없는 소비’이자 힘들고 재미없는 시간 낭비였다.
하지만 이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하나금융연구소가 2026년 발표한 웰스 리포트는 최근 10년내 부자의 반열에 오른 50대 이하 신흥 자산가를 ‘K-에밀리’라 규정했다. 평균 나이 51세, 30%는 회사원이나 공무원 출신. 총자산은 60억원대, 연평균 가구 소득은 5억원에 달한다.
이들에게 “돈을 가장 아끼지 않는 소비 영역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1위로 나온 답변은 ‘여행'(29%)으로, 2위를 차지한 취미생활(10%)을 압도적으로 제쳤다. 50대에 갓 진입한 한국의 신흥부자들은 여행에 돈을 가장 아끼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K-에밀리는 물질적 과시보다 ‘시간의 자유’를 부의 핵심 가치로 꼽았다. 돈이 있어도 시간이 없으면 부자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신흥 부자의 탄생과 함께 ‘부자’의 개념 정의를 둔 논쟁도 치열해졌다. ‘낮에 한강변을 달리며 운동할 수 있는 자유’, ‘가족과 함께 2주의 휴가를 내고 훌쩍 떠나는 CEO’ 등. 밤낮없이 일하고 돈을 모으기만 하던 이전 세대나, 외제차와 명품을 부의 상징으로 여기던 몇 년 전 트렌드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부자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 상위 10%, 1년에 평균 6번 여행 떠났다
자본주의 선진국 미국에서는 가구 소득이 높을수록 여행을 더 많이 가는 패턴이 뚜렷했다.
컨설팅 기관 레조넌스가 2026년 발표한 ‘미래 럭셔리 여행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상위 10% 가구(연소득 24만~60만 달러, 약 3억6000만~9억원)가 올해 레저 여행에 지출하는 금액은 무려 816조원에 달했다.
상위 1%는 1회 여행에 약 1860만원을 지출했으며 1년 동안 6차례의 여행을 떠났다. 1년에 여행에 쓰는 총 비용은 1억1160만원으로 나타났다. 특히 상위 1% 중에서도 연간 6번 이상, 즉 6번~11번 여행하는 비율은 2025년 기준 27%에 달했다.
상위 10% 가구는 한 번 여행에 약 1185만원을 지출했으며 1년 평균 4.3회의 여행을 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놀라운 사실은 미국 평균 여행객의 경우에도 연간 여행 횟수는 2.8번, 즉 3번이었다. 1회 여행에 평균 지출하는 금액은 3700달러, 555만원으로 나타났다.
포브스 리서치(Forbes Research)의 2025년 준부유층 또는 중상층(투자가능 자산 3억원~30억원 보유자) 설문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9%가 여행을 ‘성공의 상징’ 상위 3개 항목 중 하나로 꼽았다. 특히 여행은 럭셔리 자동차(31%)라는 답변을 크게 제쳤다. 투자 가능 자산 100만 달러(약 15억원) 이상 보유자의 75%가 “여행이 성공의 상징”이라고 답했다.
재미있는 점은 미국에서도 옛날 기성세대 부자들은 요즘만큼 여행을 많이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95세를 맞은 워런 버핏은 엄청난 돈을 축적했지만 여행을 즐기진 않았던 것 같다.
부자의 정의가 바뀌고 있다…물건에서 경험으로
미국 그랜드캐년에 갔을 때 일이다. 미국 남자아이 둘이 국립공원 주니어 레인저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조끼에 국립공원 배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옐로우스톤, 자이언(Zion), 요세미티, 록키, 아처스, 그랜드 티턴 등. 부모가 10살 전후로 보이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대륙 방방곳곳의 국립공원을 미션 깨듯 여행 다닌 것이다.
미국에서는 통상 국립공원 여행을 갈 때, 보통 중산층 가정 기준 최소 5~6일 정도 일정을 짠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인 관광객 대상 그랜드캐년 패키지를 보면 라스베가스에서 출발해 그랜드 캐년을 1박2일로 다녀온다. 심지어 그랜드 캐년, 홀스슈 밴드, 엔텔롭 캐년을 하루 만에 다녀오는 엄청난 일정도 있다.
여유 있는 여행을 즐길 수 없던 과거를 지나 이제 한국의 새로운 부자들은 달라지고 있다.
요즘엔 특히 외제차를 타거나 명품백, 명품 쥬얼리를 주렁주렁 걸친 모습이 그렇게 품격 있는 부자처럼 느껴지진 않는 것 같다. 이미 돈이 많다면 시계를 10개 가지거나 포르쉐를 타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물건은 금방 익숙해지고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경험은 기억으로 남는다.
명품 시계 10개보다 그리스 섬 크루즈 여행이나, 남극 탐험, 아프리카 사파리, 미국 국립공원 일주 같은 경험이 더 빛나는 이유는 가족이나 지인과 함께한 특별한 추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모두가 강남 아파트를 선망한다. 하지만 강남 아파트를 큰 대출을 끼고 샀지만, 그것 때문에 가족들과 제대로 된 시간을 못 보낸다면 ‘부유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지가 중요했다. 이제는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에 머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지금은 새로운 부의 개념이 롤렉스, 에르메스, 강남 아파트에서 시간, 자유, 건강, 여행, 웰니스 등으로, 물질소비에서 경험 소비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것 같다.
여행은 그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지표다. 여행은 소비지만, 단순한 소비가 아니다.
한 사람이 가진 시간과 건강, 관계와 문화적 소양, 경제적 여유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부의 종합 성적표인 것이다.
2026. 06. 17 라이프머니[LifeMone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