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더 된 일이다. 갑자기 거위털 이불에 꽂혀 태평양물산이라는 기업에 투자한 적이 있다. 구스다운 이불이 잘 팔릴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 속에 이 회사 부채비율이 300%에 달한다는 사실은 알면서 외면했다.
초보들은 이런 경우가 많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측은 대규모 유상증자를 공시했고, 그 다음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다. 울며 겨자먹기로 증자에 참여했고 태평양물산 주식에서 탈출하는데 1년 걸렸다.
요즘 시장의 뜨거운 감자는 한화그룹이다. 1년 만에 두 번의 초대형 유상증자로 시장에 충격을 줬다. 5조원에 육박하는 자금을 그룹에 수혈하는 셈이다.
지난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 3.6조 증자(최초 공시 기준)와 지난 3월26일 한화솔루션의 2.4조원 증자는 투자자들이 예상치 못한 점을 빼면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하나는 성장 투자를 위한 선택, 다른 하나는 재무 압박 속에 나온 결정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일단 두 번의 유상증자를 비교해보자.
재무적 측면에서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유증이 훨씬 황당했다. 당시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2023년 말 기준 보유현금 및 현금성자산이 2조9677억원에 달했고 수주잔고 또한 62조원에 육박해서다.
현금도 많고 돈 잘 버는 회사가 조 단위 자금 수혈을 위해 주주에게 손을 벌린 것이다.
금융감독원도 자금사용 목적 등 투자자의 합리적 투자 판단에 필요한 정보 기재가 미흡하다며 정정을 요구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도 “자본시장의 원칙인 공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훼손했다”고 비판에 나섰다.
결국 증자 규모는 다소 축소된 2조3000억원으로 정정됐고 제3자 배정 1.3조원이 추가됐다. 정정신고서 6번 제출 끝 증자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시작은 충격적이었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회사 측 설득이 시장에 먹혔다.
증자의 성격 면에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해외방산 거점투자, 합작법인 설립, 스마트팩토리 구축 등 조달금액 전부를 투자에 쓴다고 밝혔다. 기업 성장을 위한 공격적인 유상증자에 해당된다.
반면 한화솔루션은 조달금액의 62.5%(1.5조원)가 채무 상환에 투입된다. 2025년 말 기준 순차입금이 12.6조원에 달하고 부채비율 196%은 달한다. 만기 도래 전 선제적으로 조단위 자금 조달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한화솔루션은 지난 2년간 부지 및 지분 매각으로 1.6조원 규모 자산을 처분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방어적 유상증자다.
유증 발표 당일 주가를 비교해보면 지난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13% 하락했지만 한화솔루션은 18.2% 폭락했다.
한화솔루션은 증자의 성격 자체가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닌 ‘부채상환’이라는 점에서 투심이 얼어붙었다. 증자에 불참하려는 주주들의 투매가 쏟아졌다.
한화솔루션은 증자 비율도 너무 크다. 한화에어로 증자비율은 13.05%였는데 한화솔루션은 42%에 달한다. 기존 발행주식의 42%가 신규 발행되면 기존 주주 지분은 크게 희석된다. 할인율도 20%로 한화에어로스페이스(15%) 보다 훨씬 커, 주가 급락이 불가피했다.
주주들의 돈으로 빚을 갚고 이자비용을 낸다는 데 좋아할 주주는 없다.
유상증자는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유상증자는 상장 기업의 권리다. 주주에게 손을 벌려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이번에 한화솔루션 주주들은 ‘뒤통수를 맞았다’고 하소연한다. 시장과 사전 소통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물론 유상증자 같은 기업의 중대 자금조달계획은 미공개정보로 절대 사전에 시장에 알려져선 안된다. 이사회 결의 직후 공시가 이뤄지는 게 맞다.
하지만 유상증자 계획을 미리 알려줄 수는 없지만 IR(기업설명회)을 통해 회사는 주주와 소통했어야 한다.
미국과 같은 선진 주식시장에서는 만일 기업이 대규모 유상증자가 필요하다면 통상 IR을 통해 향후 2~3년 추가 자본조달이 필요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증자한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주주들이 자금조달 시점에 너무 당황하지 않도록 ‘전략적으로 이런 방향성이 있다’는 메시지를 깔아 놓는 것이다.
한국 증시에서는 이러한 소통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다. 주주총회조차 형식적으로 짜여진 각본에 따라 이뤄지고 회사 측의 일방적 발표로 끝이다. 자본 배분에 대한 회사의 철학을 시장과, 주주들과 진심으로 나누는 문화가 너무나 빈약하다.
그래서 유증 발표는 주주 입장에서 종종 ‘기습 공격’처럼 느껴진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화솔루션의 유증은 두 번 다 그랬는데, 이를 통해 한화 그룹은 주주와의 신뢰보다 내부 의사결정을 우선시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두 번의 증자는 한화 그룹이 주주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자본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 잘 드러낸 것이다.
한화솔루션의 대규모 부채, 투자자들은 몰랐을까?
한화솔루션의 재무상태 악화는 적어도 공개된 정보에 해당된다. 태양광 업황 부진, 화학 부문 적자, 미국 큐셀 투자 등 재무 압박이 심했다. 작년 말 기준 순차입금 12.6조원, 부채비율은 196%에 달한다. 이는 분기보고서나 사업보고서에 다 나오는 내용이다.
몰랐다기보다는 알면서도 외면한 것에 가깝다. 투자자들은 스토리에 좀 더 집중한다. 일반 투자자 뿐 아니라 전문가 그룹인 애널리스트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앞서 지난해 4분기 실적도 예상치를 크게 하회하며 적자가 확대됐다. -4783억원을 기록하며 시장 예상치였던 -1660억원을 큰 폭 밑돌았다.
그럼에도 시장에서는 “불확실성이 크게 해소됐다”고 했다. 미국향 셀 수출 통관 차질 문제가 해결되며 실적 턴어라운드를 전망했다. 주가도 올 들어 크게 올랐다.
부채비율은 높았지만 채무가 많아도 대기업 한화인데 그룹 차원의 지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산 매각도 했으니 스스로 부채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아마도 많은 투자자들이 ‘한화’라는 두 글자와 ‘태양광’이라는 세 글자만 보고 투자했을 거라고 본다. 내가 언젠가 ‘거위털 이불’을 보고 좋다고 투자한 것처럼…
이것은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정보의 해석 실패다. 데이터는 있었는데 그 데이터가 유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전문가도, 일반 투자자도 고려하지 않았다. 빛나는 태양광의 성장성이 눈을 가렸다.
결국 거위털 이불이든 태양광이든 투자자를 홀리는 건 항상 스토리다. 좋은 스토리는 자주 나쁜 숫자를 이긴다. 적어도 유상증자 공시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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