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작성한 ‘코스피 1만의 꿈’ 글에서 포모(FOMO)가 강세장의 동력이 될 거란 얘기를 했다. 거짓말처럼 개인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연일 이어지며 이제 코스피 9000이 눈앞이다.
역사적인 강세장이 펼쳐지고 있지만 계속되는 외국인의 100조원 순매도는 공포스러운 숫자다. 외국인 수급이 없는데, 개인 매수만으로 강세장이 이어질 수 있는가?
외국인의 대규모 순매도는 폭락장의 전조라는 주장도 나온다. 나 또한 100조원이라는 숫자에 놀라고, 여러 가지 의문을 떨칠 수 없어 객관적인 데이터를 찾아봤다.
운 좋게도 삼성증권 전균 연구위원의 리포트에 블룸버그 데이터가 있어 올해 1분기 외국인 기관 투자자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매매 동향을 분석할 수 있었다. 100조원이라는 매도 폭탄을 세세히 해부한 흥미로운 자료이니 함께 살펴보자.
100조 순매도 외국인, 삼성전자+하이닉스 순매도 합이 100조원
전균 삼성증권 연구원이 지난 4월3일 발간한 리포트에서 1분기(1월1일~3월31일) 외국인은 코스피 시장에서 삼성전자 42조원, SK하이닉스 22조원, 합산 63조원을 매도했다.
연초대비 5월 말까지 외국인 누적 순매도는 100조원에 달한다. 1분기 외국인 순매도는 70조원으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매도가 90%를 차지한 셈이다. 현대차 순매도 9조원을 더하면 사실상 외국인 순매도 대부분은 삼성전자, 하이닉스, 현대차에 집중됐다. 연초부터 5월 말까지 외국인의 삼성전자+하이닉스 순매도 금액은 100조원으로 외국인 전체 순매도 금액에 맞먹는다.
이런 숫자만 살펴보면 외국인이 한국 증시를 떠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100조원이라는 외국인 순매도를 기관 투자자별로 구분해보면 서로 다른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일단 MSCI 이머징 마켓 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펀드(인덱스 펀드)는 비중 조절 때문에 한국 주식을 팔 수밖에 없었다. 또 가치주 펀드도 저평가 주식이라고 해서 저가에 매수한 주식이 급등하자 차익실현에 나섰다. 반면 모멘텀에 베팅하는 펀드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1주도 팔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덱스 펀드의 기계적 매도: 리밸런싱 압력
작년 4분기(10~12월)와 비교해 올해 1분기(1~3월) 한국주식을 매도한 외국인의 핵심 주체 중 하나는 인덱스 펀드였다.
골드만삭스 분석에 따르면 한국 주식에 투자하는 글로벌 펀드의 총 자산은 2000억 달러에 육박하는데 이 가운데 약 690억 달러의 기계적 매도 압력이 발생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주가가 급등하면 MSCI 신흥국(EM, 이머징마켓) 지수 내 한국 비중이 커진 것이다. 벤치마크를 추종하는 패시브 펀드들은 규정상 펀드 내 한국 비중을 맞추기 위해 한국 주식을 기계적으로 팔아야 한다. 한국 주식 비중이 1% 오를 때마다 20억 달러씩 매도할 수밖에 없다. 주가가 오를 때마다 매물이 출회된다.
삼성증권 리포트에 따르면, ETF의 경우 삼성전자, 하이닉스 보유 비중이 증가했으나 EM(신흥시장) 전용 펀드에서 두 종목의 비중은 감소했다.
이들 펀드는 삼전닉스 주식을 대량 매도했지만 주가의 가파른 상승으로 남아있는 보유잔고 가치는 오히려 높아진 상태다. 즉 주가가 오르면서 비중이 계속 커지고 있어, 인덱스 펀드에서는 앞으로도 매물이 출회될 가능성이 있다.
차익실현에 나선 자들: 액티브 장기, 가치주 펀드
액티브 운용사 중에는 가치주 운용사로 유명한 피델리티와 데이비스 셀렉티드 어드바이저스 등이 올해 외국인 한국주식 매도의 주인공이다.
피델리티(FMR·FIL): 피터 린치가 마젤란 펀드를 운용한 그 피델리티다. 피델리티는 1946년 보스턴에서 설립된 세계 최대 액티브 운용사 중 한 곳이다. FMR(미국 피델리티)은 이 기간 삼성전자를 1458만5023주(약 4조3755억원를 매도했고, FIL(피델리티 인터내셔널, 영국 법인)은 803만1410주(약 2조4094억원)를 추가로 줄였다.
두 법인 합산 약 6조7849억원 규모다. FMR은 하이닉스에서도 299만470주(약 5조9809억원)를 줄였다. 전균 삼성증권 연구위원은 FMR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양쪽에서 대규모 감소를 신고한 점을 들어 “전략적 판단에 의해 한국 반도체 Top2에 대한 비중을 축소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MFS(Massachusetts Financial Services): 1924년 설립된 미국 최초의 뮤추얼펀드 운용사 가운데 하나다. 질 좋은 성장주를 오래 들고 가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MFS는 삼성전자를 1275만4089주(약 3조8262억원) 매도했다. 인덱스 추종이 아닌 펀더멘탈 분석 기반 종목 선택이 핵심 철학인 만큼, 매사추세츠 파이낸셜 서비스의 매도는 펀드매니저의 판단에 따른 결정이다.
퍼스트 이글 인베스트먼트(First Eagle Investment): 이곳은 가치투자로 유명한 운용사다. 한번 담으면 잘 안 파는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는데, 삼성전자를 586만8508주(약 1조7606억원) 줄였다. 이 운용사의 특성은 ‘밸류에이션이 우리 기준을 벗어났다’고 판단할 때 매도에 나서는 곳이다. 리스크 관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주 운용사가 비중을 줄인 것이다.
인베스코(Invesco): QQQ로 유명한 ETF와 액티브펀드를 함께 운용하는 혼합형 운용사다. 삼성전자를 532만5206주(약 1조5976억원) 매도했다.
데이비스 셀렉티드 어드바이저스(Davis Selected Advisers): 여기는 워런 버핏 스타일의 가치투자 운용사로 알려진 곳이다. 장기 보유가 철학인 이 운용사도 SK하이닉스 201만6130주(약 4032억원)를 처분했다.
한국 반도체주에 베팅하다:캐피탈그룹과 블랙록
인덱스 펀드와 가치주 펀드 일부가 삼성전자, 하이닉스 주식 대량 매도에 나섰지만 한 주도 팔지 않거나 오히려 추가 매수한 외국인 기관투자자도 있었다.
캐피탈 그룹(Capital Group): 1931년 LA에서 설립된 총운용자산 3조 달러(약 4200조원)의 운용사로 뱅가드, 피델리티와 함께 미국의 3대 운용사로 꼽힌다. ‘American Funds’라는 브랜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캐피탈 그룹은 SK하이닉스 3702만9665주(약 74조원 규모의 포지션)를 2025년 2분기부터 2026년 1분기까지 단 한 주도 변동 없이 유지했다. 다른 운용사들이 비중 축소나 차익실현에 나서는 동안 확신의 보유(Holding) 전략을 유지한 것이다.
그리고…가장 주목할 만한 외국계 운용사는 바로 블랙록이다.
블랙록은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다. 총운용자산 약 11조 달러(약 1경5000조원). iShares ETF를 통한 패시브 운용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많은 액티브 펀드도 운용한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주요 기업의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보이지 않는 주주’로 불리기도 한다.
블랙록이 삼성전자 주식을 산 건 2019년 초다. 앞서 2016~2018년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붕괴된 직후로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반토막 났을 때다. 당시 블랙록은 삼성전자 약 3억주를 주당 4만5000원에 쓸어담았다.
그리고 약 8년이 흐른 지금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한복판에서 삼성전자 주가는 35만원에 육박하고 있다.
블랙록은 삼성전자가 기록적인 상승세를 기록한 작년부터 올해 1분기 말까지, 단 한 주도 팔지 않았다. 2025년 2분기부터 2026년 1분기까지 보유량은 3억391만61주 그대로다. 현재 평가수익률은 600%를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블랙록은 심지어 SK하이닉스는 추가 매수했다. 다른 외국인 기관투자자들이 하이닉스를 매도하는 동안, 1분기에 367만7229주를 추가 매수했다.
삼성전자는 홀드하고, 하이닉스는 추가 베팅한 것이다.
블랙록이 공식 입장을 낸 적은 없지만, AI 산업의 ‘쌀’ 반도체에 베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인덱스 펀드와 가치주 운용사들이 삼성전자, 하이닉스 주식을 매도하고 있지만 이들은 거꾸로 ‘불타기’하는 중이다.

노무라, 그리고 흥미로운 아메리칸 센추리의 하이닉스 베팅
블룸버그 자료에는 또 눈길을 끄는 외국인 기관투자자가 있다.
아메리칸 센추리 인베스트먼츠(American Century Investments)는 하이닉스 보유주식이 97만177주에서 143만6533주로 증가했다. 즉 120만7069주(약 2조4141억원)를 추가 베팅했다.
아메리칸 센추리는 1958년 캔자스시티에서 설립된 총운용자산 약 3000억 달러(약 420조원)의 중형 액티브 운용사다. 성장주와 가치주를 넘나드는 다양한 전략을 운용한다.
2016년 노무라 홀딩스가 이 회사 지분 41%를 인수하며 전략적 파트너가 됐다. 두 회사는 서로의 펀드 상품을 각 시장에서 판매하는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노무라가 일본과 아시아 시장에서의 강점을 바탕으로 어메리칸 센추리의 운용 역량을 활용한다.
공교롭게도 노무라는 올해 SK하이닉스 목표주가를 234만원에서 400만원으로 대폭 상향하며 “이제 사이클주가 아닌 구조적 성장주”로 확신의 매수 콜을 외친 하우스다. 노무라의 리서치 시각과 어메리칸 센추리의 실제 매수 행동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무라의 공격적인 시각이 일부 반영된 것 아닌가 싶은 추측이 든다.
피델리티 팔고, 블랙록은 베팅했다
‘외국인 한국주식을 100조원 순매도했다’는 것은 팩트다. 하지만 그 숫자를 자세히 해부해보면 좀더 복잡한 진실이 들어있는 걸 알 수 있다.
외국인 기관 투자자의 매수,매도의 총합은 마이너스 100조원이지만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한 것은 아니다. 블랙록은 세계 1위 자산운용사이고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에 여전히 ‘확신의 베팅’을 하고 있다. 캐피탈그룹과 아메리칸센추리도 마찬가지다.
패시브 펀드의 경우 특정 보유종목 주가가 오르면 비중이 너무 커질 수 있어, 반드시 리밸런싱을 해야 한다. 즉 비중 축소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리고 가치주 펀드는, 가치주 투자가 자주 그런 것처럼 강세장 초기에 주식을 매도하는 경우가 꽤 많다. 그것은 가치주 펀드의 숙명이다. 피델리티나 데이비스 셀렉티드 어드바이저스처럼 보수적으로 자금을 운용하는 곳들은 충분한 이익이 발생했고 더 이상 가치주가 아니라는 판단에 매도에 나서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내노라하는 글로벌 가치주 펀드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식을 그간 장기 보유했다는 점이다.
국내 주식시장에서는 이들 주식이 가치주가 아니라는 논쟁이 자주 일어나곤 한다. 그런데 글로벌 가치주 펀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삼전닉스를 태연하게 품고 있었던 셈이다.
같은 종목이지만 “이제는 매도 시점”이라고 판단한 피델리티나 “더 간다”고 본 블랙록은 모두 수 십 년 운용경력을 가진 세계 최정상급 자산운용사들이다. 피델리티의 조기 차익실현도 블랙록의 과감한 베팅도 둘다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다. 주식하는 철학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개인 투자자로서 나는 어떨까.
외국인이 한국주식을 100조원 매도했다는 사실 만으로 겁먹기 전에, 내가 피델리티에 가까운지 블랙록에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지금 반도체 베팅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언제까지 보유할 것인가. 나의 목표 금액은 얼마이며 언제 매도 결정을 내릴 것인가. 한 번에 다 팔 것인가, 분할 매도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반도체주를 신규 매수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반도체 강세장에 합류하지 않고 굴뚝 가치주나 소외된 바이오주를 꿋꿋이 지켜간다면 또 그 이유는 무엇인가.
투자에는 정답이 없다. 본인의 철학에 맞춰 주식을 잘 굴리고 자산을 불리면 되는 것이다. 내가 비난하는 무지성 투자로 누군가 부자가 된다면, 그 사람의 투자철학이 틀린 것이라 할 수 없다.
오늘 월스트리트저널 기사를 읽다 재밌는 사례를 보았다.
조지 밴더하이든은 한 때 월스트리트에서 최고 수익률 기록을 보유한 피델리티 펀드매니저였다. 그는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이 곧 붕괴할 것으로 예상하고 기술주를 매도했다. 대신 그는 미국 국채를 대거 매수했다. 투자자를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펀드 성과는 부진했고 2000년 2월 그는 결국 은퇴했다. 그는 사무실 화이트보드에 이런 문구를 남기고 떠났다.
“튤립 구근 판매합니다.(Tulip bulbs for sale)”
이는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투기 광풍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포트폴리오를 위험 관리 중심으로 운용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시장은 그런 태도에 보상해주지 않았다. 시장은 지금 미쳐있다. ”
한 달 뒤 시장은 고점을 쳤고, 버블은 결국 터졌다. 조지 밴더하이든의 판단이 결국은 옳았다. 하지만 그는 시장의 광기를 과소평가해 주식을 너무 일찍 팔았다.
참고: 보유기관 변동 데이터는 삼성증권(전균 파생 연구위원, 2026년 4월 3일 발간) 및 블룸버그 집계 기준이다. 2025년 4분기 말 대비 2026년 1분기 말 기준 변동량. 금액 환산은 최근 주가 삼성전자 30만원, SK하이닉스 200만원을 대입한 추정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