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도 화끈하게 주식 태운다”…28조 자사주 소각의 진짜 의미

2026년 들어 한국 증시에서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기업들이 앞다투어 자사주를 태우고 있다.

국회가 지난달 자사주 소각을 원칙으로 하는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뒤 기업들이 잇달아 소각 결정을 내리면서, 3월 12일 기준 자사주 소각을 결의한 상장사는 48개사, 소각 규모는 약 6조9970억원을 기록했다. 삼성전자(약 16조원)와 SK(약 5조원) 등 대기업의 대규모 소각 계획을 합하면 약 28조원, 30조원에 육박하는 자사주 소각이 이뤄질 예정이다.

개정안이 통과되자마자 일어난 대규모 소각 공시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불과 5년 전인 2021년 메리츠금융지주가 배당을 축소하고 자사주 소각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한국증시는 ‘자사주 소각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배당을 줄였다며 KB증권에서는 투자의견 매도(SELL) 리포트가 나왔고 당시 합병 전 메리츠증권,메리츠화재 주가는 15% 폭락했다. ‘배당을 줄이고 자사주를 소각하다니…아이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폭락한 메리츠금융지주는 후일 대규모 자사주 소각을 이어가며 300% 가까이 상승했다.

주가는 EPS(주당순이익)의 함수다. 자사주를 태우면 EPS가 올라간다. 즉 주가가 오르게 된다. 쉽게 설명하자면 회사의 가치가 100이고, 주식수가 100개일 경우 주당 가치는 1이 된다. 그런데 회사가 자사주 10주를 매입해 소각하면 남은 주식수는 90이 되면서 남은 주주지분의 가치가 커지는 것이다. 자사주 소각은 배당과 더불어 회사가 이익, 즉 현금을 주주에게 돌려주는 주요 방법이다.

다만 자사주 소각은 배당과 달리 세금을 내지 않으므로, 주주에게 배당보다 더 이득이 된다. 블룸버그 칼럼리스트 Matt Levine은 자사주 소각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회사가 투자기회를 찾지 못했을 때 주주에게 현금을 돌려주는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다. 하지만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즉 ‘자본분배 관점’에서 자사주 소각은 가장 강력한 주주환원정책이다. 자사주 소각은 바로 주주들의 지분율을 직접적으로 올려주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도 “주식이 저평가되어 있다면 자사주 매입(소각)은 최고의 투자”라고 말했다.

상법개정안이 통과된 올해는 1분기부터 대기업들의 조 단위 소각 발표가 자사주 소각 랠리를 이끌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10일 사업보고서를 통해 보유 자사주 약 1억543만주 가운데 약 8700만주를 올해 상반기 중 소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약 16조원 규모로 평가되는 물량이다. 국내 기업 기준으로 단일 기업 자사주 소각 규모 중 사상 최대 수준이다.

SK 역시 대규모 소각을 결정했다. SK는 10일 이사회를 열고 보유 자사주 약 1798만주 가운데 임직원 보상용을 제외한 약 1469만주를 소각하기로 했다. 소각 규모는 약 5조1575억원으로 발행주식의 약 20%에 해당한다. 이 또한 국내 지주회사 사상 최대 수준의 자사주 소각 결의다.

중견기업에서도 자사주 소각이 이어졌다. SK네트웍스는 자사주 2071만주를 소각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발행주식의 약 9.4% 수준이다. KCC는 보유 자사주 153만2300주 가운데 117만4300주를 소각하기로 했으며 이는 발행주식의 약 13.2%에 해당한다. 그밖에 롯데지주, 셀트리온, 미래에셋생명도 줄줄이 대규모 소각을 발표했다.

기업들이 잇달아 자사주 소각에 나선 배경에는 최근 시행된 개정 상법이 있다.

2월25일 상법 3차 개정안 통과로 자사주 장기 보유가 어려워지면서 기업들이 선제적 소각에 나선 것이다. 이번 상법개정안은 기업이 보유한 자사주를 원칙적으로 소각하도록 규정하고 신규 취득 자사주는 1년 이내, 기존 보유 자사주는 1년6개월 이내 처분하거나 소각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번 변화의 진짜 의미는 단순한 제도 대응 이상의 것이다.

그동안 한국 기업들은 잉여 현금을 쌓아두거나 자사주를 사들인 뒤 장기간 보유하는 경향이 강했다. 회사 내에 쌓인 자사주는 경영권 방어, 우호지분 확보, 승계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활용됐다.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으면 발행주식 수가 줄지 않기 때문에 주당이익(EPS)이나 기업가치에는 실질적인 변화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한국 증시는 오랫동안 ‘자사주 매입은 있지만 소각은 없는 시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흐름은 이런 구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을 보여준다.

자사주가 소각되면 발행주식 수가 줄어들면서 기존 주주의 지분율이 자동으로 높아지고 주당이익이 상승하게 된다. 기업이 보유한 현금이 기업 내부에 머무는 대신 주주 가치로 이전되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업의 현금 활용 방식이 ‘내부 유보 중심’에서 ‘주주 환원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라는 해석이 나온다. 단순히 주주환원정책 개선을 넘어 자본배분의 관점이 달라진 것이 중요하다.

투자자 관점에서도 중요한 변화다. 자사주를 많이 보유한 기업들은 그동안 시장에서 할인된 평가를 받아왔다. 언제든지 다시 시장에 풀릴 수 있는 잠재적 물량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사주 소각이 확대되면 이런 매도 물량 우려가 사라지면서 기업가치 재평가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지주사와 현금이 많은 대기업들이 이번 변화의 핵심에 서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국 증시에서 지주사 할인은 고질적인 저평가 이슈였다. 복잡한 지배구조와 낮은 주주환원 정책이 결합되면서 순자산가치 대비 주가가 크게 낮게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근 자사주 소각 흐름은 이러한 할인을 일부 완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변화는 일본 증시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2023년 도쿄증권거래소가 기업가치 제고 정책을 추진한 이후 일본 기업들의 자사주 소각이 빠르게 증가했고, 그 과정에서 지주사와 저평가 기업들의 재평가가 이어졌다. (당시 거래소 측은 PBR(주가순자산비율) 1배 미만 기업들에게 저평가의 이유를 설명하라고 한 뒤 이를 해소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 자사주 비중이 높은 기업이나 현금이 풍부한 기업들을 중심으로 자본 배분 방식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한국 증시의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점차 해소될 것이다.

즉 이제 시작된 자사주 소각 러시는 단순한 주주환원 정책이 아니라 한국 기업들이 그동안 유지해 온 ‘현금 축적형 자본 구조’에서 ‘주주환원형 자본 구조’로 이동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신호인 것이다.

최근 자사주 소각 흐름에서 눈에 띄는 점은 대기업과 지주사들이 먼저 움직였다는 점이다. 상법 개정안 통과로 자사주 장기 보유가 어려워지자 기업 측은 자사주를 ‘보유 자산’이 아니라 ‘소각을 전제로 한 자본 관리 수단’으로 인식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현금이 풍부하고 자사주 비중이 높은 대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소각에 나서면서 기업들의 자본 배분 방식 자체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기업에게 자사주는 일종의 대주주의 ‘숨은지분’같은 존재였다. 한국기업들은 그간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보유하며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잠재적 수단으로 관리했다. 하지만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되면 이는 영구적으로 사라지고, 그만큼 기존 주주의 지분율이 높아지게 된다. 즉 기업 내부에 머물던 자본이 주주에게 이전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자사주 소각이 확산되는 것은 단순히 주가부양 정책을 넘어 한국 기업의 자본구조와 지배구조를 동시에 바꾸는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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