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한 선배를 만나 대화를 했는데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주로 회사 사람들과 취재원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누구는 강남에 집을 샀더라, 누구는 아들이 Y대 의대를 갔더라, 누구는 승진해서 상무가 됐더라, 누가 퇴사를 해서 어디로 이직했다는 등 이야기가 주류였다.
예전에도 늘 듣던 이야기였는데 새삼 미국에서 2년 살다 한국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생소한 느낌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가 ‘사회적 지위’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A는 사회적 지위가 올라갔고, B는 부자가 됐고, C는 벼락거지가 됐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한국에서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지위 신호(status signal)’가 중요하다. 지위 신호란 ‘나는 이 사회에서 이 정도 위치야’라는 걸 보여주는 신호다. 예를 들면 거주지의 위치(서울 강남, 강북 또는 지방), 직업(의사, 변호사, 공무원), 학교(SKY, 지방대), 소비(외제차, 명품) 등이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지위 신호’에 해당된다. ‘과시적 소비’ 개념으로 유명한 쏘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이 이 개념을 체계화시킨 사회학자로 유명하다.
선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한국의 40대부터 60대까지는 정말 ‘비교하는 것이 곧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세대는 산업화부터 입시, 부동산까지 경쟁이란 경쟁은 모두 겪어서 경쟁 의식이 매우 강한 세대다. 나 또한 40대에 속한 사람이지만 20~30대때 경쟁이 힘들었는데 40대가 되니 이제는 비교가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비교 문화로부터 정말로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때로는 단순히 거리를 두는 걸 넘어 ‘한국인의 궤도’로부터 이탈하고 싶단 생각이 든다.
비교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또 기본적 욕구가 충족된 다음에는 사회적 위계질서에서 한 단계 높은 곳을 오르고 싶어하는 것도 인간 본성의 일부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본능이라면, 우리는 비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나는 미국에서 2년을 살았다. 미국인들은 비교 방식이 좀 달랐다. 타인에게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연봉은 얼마인지, 집이 자가인지를 직접적으로 묻지 않는다. 사실 그런 질문은 미국에서 굉장히 무례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이라고 서로 비교를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비교하는 문화가 있었다. 한국처럼 어느 동네에 살고, 어느 직업을 가졌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홀푸즈(Whole Foods)에서 장을 보고, 아이를 차터 스쿨(사립학교)에 보내고, 집에서 골프와 테니스 개인 레슨을 하고 운동은 에퀴녹스에서 한다고 대답한다. 자본주의의 최강국 답게 소비와 라이프스타일로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신호를 보내는 방식에는 이렇든 차이가 있지만 신호를 보내고, 읽어낸다는 행위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러니까 비교는 문화의 산물이기 이전에 인간의 운영 체제 같은 것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사회 비교 이론’이라고 부른다. 1954년 리언 페스팅거(Leon Festinger)가 제시한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의견을 평가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한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기본값이다. 본능이다. 우리는 비교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비교를 멈추지 않으면 안 되는 쪽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한국의 비교 문화가 유독 피로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비교의 ‘밀도와 속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좁다. 지리적으로도 좁고, 사회적 네트워크의 연결망이 좁다. 친구의 친구가 내 직장 동료이고, 전 직장 상사가 취재원의 아는 사람이다. 이 좁은 망 안에서 정보는 빠르게 순환한다. 누가 집을 샀는지, 누구 아이가 어느 대학에 붙었는지 하루 이틀 안에 지인 네트워크를 타고 퍼진다. SNS는 그 순환을 초고속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연령대별 기준점이 더해진다. 서른 살에는 취업을 해야만 하고, 서른다섯에는 결혼을 하고, 마흔에는 내 집이 있어야 하고, 쉰에는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갔어야 한다. 이 기준점들은 누가 법으로 정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있다. 그 기준점에 미달하면 단순한 개인의 상황이 아니라 사회적 실패처럼 읽힌다. 비교가 단순한 관찰을 넘어 심판이 되는 순간이다.
선배와의 대화가 피로했던 이유를 이제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대화는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 갱신하는 일종의 사회적 의식이었다. 나는 그 의식에서 이미 반 쯤 이탈해 있었고, 그래서 그 대화가 낯설게 들렸다. 한국인은 참말로, 매일,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는 심판대 위에서 점수를 받고 내려간다. 타인의 시선은 말 그대로 지옥인데, 나 자신의 시선조차 예외가 아닌 그런 지옥 말이다.
그렇다면 이탈은 가능한가.
비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비교의 기준점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어제의 나와의 비교로. 사회가 설정한 기준점에서 내가 설정한 기준점으로.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왜냐하면 기준점은 혼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 주변 사람들이 여전히 같은 기준으로 나를 바라볼 때 그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기란 초인적인 의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한국인의 궤도’에서 이탈하기 위해 실제로 한국을 떠나기도 한다. 해외 이민이 단순한 기회의 탐색이 아니라 비교 문화로부터의 탈출인 경우다.
하지만 장소를 바꾸는 것이 근본적인 해답은 아닐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목격했 듯, 비교는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사느냐다.
선배와 헤어지고 생각해봤다. 저 대화에 등장한 사람들—강남에 집을 산 사람, 아들을 의대에 보낸 사람, 상무가 된 사람—이 지금 그것들 덕분에 행복한지 나는 모른다. 아마 그들도 또 다른 비교의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강남에서도 더 좋은 동네가 있고, 의대를 갔어도 세부전공 선택이 남아 있고, 상무 위에는 전무가 있고, 전무 위에는 부사장이, 그 위에는 사장이 있고…비교는 그야말로 끝이 없다.
그리고 그 사다리의 맨 위에 올라간 사람도, 올라가고 나면 결국 같은 질문과 마주칠 것이다. 이게 내가 원했던 것인가. 다음은 뭔가? 다음 도파민은?
비교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비교에 끌려다닐 필요도 없다. 특히 40대가 되니 한국인의 궤도에서는 조금 벗어나서 나만의 궤도를 그리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 남이 그린 지도에서 길을 찾고 싶지 않고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불안정하더라도 직접 나만의 지도, 진짜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그게 가능할지는 아직 모른다.